이나영
서인천 고등학교 2학년
수많은 뛰어난 민족 지도자, 지식인들의 배경에는 어떠한 교육환경이 있었는가에 대해 탐구하면서 이들을 뛰어나게 만든데에는 교육환경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파악한 후 현재의 교육제도와 이를 면밀히 관계지어 교육제도에 대한 태도를 재고하기 위함이다.
탐구동기
탐구개요
1. 기독교 주의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배경과 이념
1-2 배재학당 출신인물, 개화기의 국어학자 주시경
1-3 한국 최초의 여의사 , 박에스더
1-4 학교 담 넘어 시위 민중 속으로..유관순
2. 문화주의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2-1 진명 여학교 출신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2-2 최초의 근대 여성작가 김명순
2-3 영남 최초의 여성 성악가, 추애경
3. 민족주의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
3-1 점진학교 설립자, 안창호가 끼친 그의 영향
“ 대한제국과 미국을 비교하자면, 견줄 바도 없이 미국이 강하다.”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과 유럽을 견문 시찰한 보빙사절단 단장 민영익이 국왕인 고종과 독대하며 한말이다. 보빙사절단은 중국이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은 독립을 보존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받기위해 친미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개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며 선진화된 문물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던 고종에겐 후진성을 탈피해야한다. 라는 깨달음을 주었을 것이다.
고종은 따라서 정식적으로 1884년 7월3일에 매클레이 선교사가 보낸 제안서를 허가하며 ’ 학교와 병원 그리고 전신부설사업을 해도 좋다. ‘ 라며 윤허 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사립학교의 시작이며, 근대 한국의 교육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였던 미국의 교육방법을 본받아 인재를 양성하자 라는 문구이다. 근대 한국의 교육은 이처럼 민족적 자각에서 싹텄으며 이시기의 교육은 곧 민족운동이었고 민족운동은 즉 교육구국 운동이었다.
근대사립학교의 설립이념과 배경에 대한 연구를 밝히기 전, 이들이 발전해나간 방식에 대해 서술을 하고 시작을 하도록 하겠다. 이들은 1)기독교학교에서 시작을 하였으며 기독교학교에서 시작한 이들이 사회에 나가 2)문화학교로, 그리고 전자의 학교들에서 배움을 얻은 이들이 동일한 민족의식을 지니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설립한 3)민족학교가 되는 것이다. 근대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 세 학교가 주도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며, 따라서 이들의 설립이념에 대해 밝히는 것은 대한민국 근대교육의 이념을 밝히는 것이다.
한미수호통상조약으로 인해 정식적으로 기독교가 국내에서 포교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기독교 선교사들의 목적은 단순한 선교가 아니었다. 이들의 진정한 목적은 교육이나 의료사업을 통해 조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이들을 교육을 통해 계몽시켜 성장시키길 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네비우스 목사의 저서에 정확히 드러나 있다.
1.교회의 제도와 기관은 신자들의 힘에 알맞게 발전시킨다.
2.부인과 소녀를 개종시키고 교육하는 데 힘쓴다.
3.기독교 교육은 지방과 도시에서 초등학교를 교육함으로서 더욱 잘 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신자의 자녀들은 이 미션학교에서 교육한다.
4. 모든 종교 서적은 외국어를 넣지 아니하고 순전히 한국어로만 기록한다.
5.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은 자기 본래의 직업을 그대로 가지고 생활하면서 이웃을 전도하다.
6. 앞으로 한국인 교역자가 많이 나오도록 선교사들은 노력한다.
7. 상류계급보다 하급 노동자 계급을 상대하여 전도한다.
8. 교회당도 그 교회 자신이 돈을 마련하여 짓도록 한다. 그러니 신설교회는 자치적인 교회가 되어야한다.
9 의료 선교사들나 약이나 주는 일은 선교의 효과가 없으니 환자를 치료하는 동안에 직접행동으로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된다.
10. 교회가 스스로 사람과 돈을 마련할 수 있을 떄 더 훌륭한 일꾼을 모시게 된다.
이처럼 기독교 주의를 전제를 선교로 삼지만, 한국의 실정을 감안하여 성리학적 전통에 과감히 도전하기보다는 온건한 방법으로 학교를 설립하고 의료사업을 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병원과 고아원이 등장하였으며 우리 역사상 기독교 계열 최초의 학교이자 기독교주의에 의한 사립학교 ‘배재학당’ 이 등장한 것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학교로, 당시의 한 나라의 국왕이 한 학교에 이름을 작명한다는 것은 전후무후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인재를 양성해야한다 라는 포부를 밝히며 친히 이름을 선사한 것으로 보인다. 배재학당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의미는 위대한 삶, 선한 사람, 고상한 사람으로 기독교 정신을 담긴 것으로 예상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기독교적 정신은 기독교적 주의에 의해 세워진 많은 사립학교들이 강조한 이념 ‘ 봉사정신 ’에서 또한 찾아 볼 수 있다. 신약성서 중 “너희 중에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의 종이 되어야 하느니라.” 라는 봉사를 으뜸으로 여겨야한다는 말은 봉사정신을 칭하는 말로 자신의 배움을 통해 남들을 거느리는 것이 아닌 남에게 부림을 맞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배재학당뿐만 아니라 기독교주의를 전제로 한 학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스크랜튼 부인의 이화학당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이화학당의 설립목적은 “ 이 여아들을 우리 외국사람의 생활, 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만드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들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들기를 원하며,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가지게 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다” 로 한국인들을 급진적인 교육을 통해 개화하려고 하였던 것 이아니라 그들이 그들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게 하며 그들 스스로의 발전과 계몽을 타파하길 원했던 것이다. 이화학당의 교사 로드 웨일러는 “우리는 여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라는 의문에 대해 “ 우리의 교육목적은 한국 여성으로 하여금 기술학교의 조수가 되고 의료사업에 있어 간호부와 조수가 되게 하려는 데에 있다. 그들은 음식을 만들며 자기 자신과 집을 깨끗이 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이것은 모두 한국식으로 하여야하는데 , 단지 그들을 그들의 동포로부터 유리하게 하지 않고, 자기 환경에 대해 불만을 품게 하지 않으며 학교를 떠나간 뒤에 만족 시킬 수 없는 여구를 가지지 않게 하는 정도 안에서 개량하며 한국의 실정에 맞춰야 한다”라고 이야기 했고, 이는 이화학당이 온건적인 교육개혁방향을 가지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기독교주의를 전제로 세워진 학교들은 모두 풍속 예절 존중을 이념으로 삼았으며, 선교활동과 아울러 봉사와 희생정신의 본보기를 보여주어 국가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를 원하였다.
주시경 ( 1876 – 1914 ) 은 우리에게 국어 연구와 운동을 통해 알려진 학자로, 또한 일제 침략에 맞서 대응한 학자중 한 명이다. 주시경이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던 도중이었다. 신학문에 매혹된 주시경은 이에 대해 학습하고자 1984년 배제 학당에 입학하게 되는데, 도중에 인천부 관립 이운학교에 장학생으로 발탁 되어 졸업하기도 하나, 정치적문제로 인해 흐지부지되고, 1896 년 4월 배제학당 보통과로 다시 입학하게 된다.
주시경의 한글에 대한 열정과, 그가 한글에 미친 영향은 일일이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로 그는 국어학이라는 학문자체의 연구와 이의 보급에 대해 열정과 포부를 가지고 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문동식회를 결성해 한글 기사체의 통일과 연구에 힘쓰기도 하였고 뿐만 아니라 국어학 자체의 중흥을 위해 여러 학교와 강습소에서 교사 강사직을 맡아 한글을 가르치고 보급하는 데에 그 누구보다 노력하였다. 주시경 선생이 일반인들에게도 한글을 보급하여 대중화하기 위해 힘썼던 마음은 바로 ‘봉사 정신’ 으로 이는 그의 출신학교 배제학당의 설립이념과 유사하며 그의 이러한 정신은 배재학당에서부터 얻은 배움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라 추측해 낼 수 있다.
주시경은 영향이 미친 곳은 단지 한글연구 뿐만이 아니다. 그의 영향력은 또한 한국 근대교육에 있어서도 눈여겨 볼 수 있다. 주시경이 살았었던 19세기말과 20세기 초는 개화기시기로 많은 지식인들이 교육이라는 학문에 눈을 뜨게될 시점이었다. 그는 조국의 장래를 위해서 교육활동 등에 헌신적이었으며 말은 한 나라의 정신을 담고 또 글은 이 말을 담는 그릿이며 , 말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글은 더 나아가 말을 닦는 기계, 즉 말을 발전시키는 힘을 가졌다고 이야기하며 국어학의 중흥과 근대의 교육을 연결 지었다. 이러한 주시경의 교육사상으로부터 눈여겨보게 될 점은, 외래어의 무분별한 남용으로 인해 날로 혼탁해져가고 있는 오늘날의 언어생활을 반성하는 데에 도움이 되며 나라의 정신과 문화를 함축하고 있는 언어가 파괴된다면 그 나라의 정체성도 잃게 될 것이라는 경각심을 가지게 되는 기회 또한 된다.
박에스더 ( 1877 – 1910 ) 는 한국최초의 여의사로, 1886년 최초의 여성근대학교인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에스더는 학업에서 대체적으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영어에 능통해 선교사들의 통역을 도맡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충실히 수업을 들으며 그녀의 잠재성을 키워가던 도중, 그녀는 우연한 배움의 기회를 얻어 의학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고 이 때, 의학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한국최초의 여의사가 탄생한 시점이 바로 이 시점이다.
1885년 그녀는 유학길에 올라 볼티모어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게 되는데, 학업 성적이 뛰어난 학생들 속에서도 그녀는 눈에 띌만한 성적을 거두며 1890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의사가 된 후 마냥 밝은 미래가 기다릴 것 같던 그녀에게도 고난은 있었는데, 바로 의사가 되어 졸업하기 3주전 그녀를 보필하던 그녀의 남편이 삶을 다한 것이다. 그러한 역경 속에서도 그녀는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일삼아 그녀의 남편을 되새기며 학교를 졸업하였고 의사로서의 포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돼, 유학길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의학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를 아는 이들은 그녀를 속된말로 ‘일벌레’ 라고 칭하였는데 그녀는 진료시간이 끝난 시점에도 아픈 이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진료 하였고, 한 달에 몇 없는 휴일에도 진료를 하는 등 그녀의 출신학교의 설립이념인 ‘ 봉사정신 ’을 몸소 실행한 인물로 보인다.
콜레라가 만연해 위생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된 시점에도 선진화된 의학상식을 지닌 그녀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위생교육을 실시하였다. 위생교육을 진행하며 그녀는 선교조차 놓치지 않았고, 이는 그녀가 기독교주의 에 의한 사립학교에 의한 출신 이며, 하나님을 위해 또 일하고 일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한 그녀는 사회적 취약계층인 농아들을 위해 설립된 학교에서도 교육자로 근무하며 다시 한 번 ‘봉사정신 ’을 실천하고 진정한 배움을 나누고자 하였다. 박 에스더는 33세의 젊은 나이로 삶을 다했지만 그녀의 봉사정신과 배움을 나누고자 하는 정신은 아직도 우리의 곁에 따뜻한 온정으로서 남아 있다.
한국의 독립운동 사를 논하는 데에 있어 유관순이라는 인물을 빼놓고 논하는 일은 단연 가당치 않은 일이다. 유관순은 그 누구보다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자신의 피와 살을 깎았지만, 그녀는 결코 독립이라는 빛을 보지 못한 채 어두운 감옥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렇지만, 그녀는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현대인들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로 기억되며 우리에게 있어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안겨주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관순은 충청남도 기독교집안의 태생으로 선교사의 소개를 받아 이화보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입학 후 학업에 정진하며 가능성을 쌓아가고 있었지만 시대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바로, 그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잊을 수 없는 날,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일어난 항일 민주운동이 일어난 날, 1919년 3월1일이 눈앞에 다가오게 된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각각 기독교, 천도교 등의 종교를 믿는 이들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하였고, 이에 더불어 우리의 시민들 역시 일제의 강압적인 식민정치에 반발하며 억압 됐던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광장 속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눈여겨 볼만한 점은 다수 학생들의 참여라고 볼 수 있는데, 학교의 담을 넘어 자신이 진정 추구하는 민족독립을 이루기 위해 시위민중 속으로 함께 한 것이 바로 이에 해당된다. 그리고 바로 이들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유관순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분! 반만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저 잔인한 일본이 강제로 빼앗았습니다. 그 동안 우리 민족은 나라 없는 서러움과 일제의 압박에 시달려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모두 일어날 때입니다. 나라를 되찾읍시다. 대한 독립 만세!”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시위도중 돌아가셨고, 유관순은 일본군의 잔인무도한 수많은 고문과 핍박에 시달려야했다. 그렇지만, 유관순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우리 민족의 독립성을 회복해야 함을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이화학당의 설립자 스크랜튼 부인의 이화학당 설립이념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다 “이 여아들을 우리 외국사람의 생활, 의복 및 환경에 맞도록 만드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들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들기를 원하며,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긍지를 가지게 되는 것을 희망하는 것이다. ” 유관순은 이화학당의 이러한 배움으로부터 자신의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게 된것이며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 까지 자신의 꽃다운 나이 18세를 희생한 것이다. 유관순 여사의 국가를 향한 숭고한 희생정신과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그 뜨거운 열망은 여전히 현대인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아 우리의 애국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까지 독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그녀에게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 유관순 열사의 유언이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실력양상, 생활향상, 계몽활동, 문화향상은 단순한 교육기관의 설치만으로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고자하는 교육의 무엇인가? 우리는 교육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라는 교육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즉 교육의 이념을 통해 문화는 자연히 향상하게 되는 것이다 . 개항이 되면서 많은 관료와 유학생들로부터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따라서 정부에서도 시대적 요청에 순응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외국의 제도를 습득하여 육영공원이라는 근대학교를 최초 설립 하게 된 것이다. 양반자제들만을 학생으로 받아들인 점에 대해선 분명한 한계점이 존재하지만, 외국어 교육과 외국문물에 대한 지식습득을 위한 교육과정을 실시하였다는 점, 교육의 필요성을 되새기게 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뭐라할 여지없이 큰 성과라고 칭할 수 있다. 문화주의에 의해 설립된 다양한 사립학교들 중 눈여겨봐야 할학교들은 여성중심학교들이다. 여성의 지위향상과 문화인으로서 교양과 지성을 갖추기 위한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제기 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여학교가 각지에서 설립 되었다. 이화 배화 등의 선교주의 적 여학교가 여성교육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에 따라 자극을 받은 여성 민간 교육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그 당시 사회문화적으로 규범화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 여성의 실력양성을 장려하며 남녀평등에 입각한 인권에 대한 강좌를 실시하였고, 여성교육기관에 대한 설치를 강조하였다. 선교사의 자본이 전혀 없는 문화주의 학교인 정선여학교, 진명여학교, 명신(숙명) 여학교, 동덕여학교 등은 여성교육에 힘쓰며 여자들에게 배움을 주고 그로부터 하여금 사회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보다 주체적인 여성이 될 수 있도록 하여금 힘썼다.
나혜석이라는 인물은 최초의 서양화가, 독립운동가, 시인으로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이 뿐만 아니라 ‘ 신여성 ’ 이라는 키워드로도 언급이 되어져오고 있는데 , 신여성의정의는 개항기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 구시대적인 여성관과는 다르게 새로운 생각과 표현을 하는 여성으로서 유년기 여유로운 집안의 지원 아래 수원 삼일 여학교 졸업후 진명 여자보통 여자학교를 다닌 나혜석도 이에 해당된다.
신여성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는 나혜석은 사회문화적으로 규범화된 여성의 성역할에서 탈피해 여성을 누군가의 조연이 아닌 삶의 주체이자 주연으로서 그녀의 작품을 표명하려고 했던 데에 의의가 있다. 나혜석은 진명 보통 여학교를 다니면서 자신이 미술과 문학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고, 동경으로 유학을 가게 되는데 그녀는 이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일본의 여성문화와 타지 출신 이방인여성으로서 많은 감명을 받고 여성해방에 대한 글을 주로 작성하게 된다. 만약 나혜석이 여학교에 가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녀의 작품을 감상하고, 읽어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여학교는 이처럼 여학생들의 숨겨져 있던 재능들을 발견하고 ,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또한, 그녀는 다양한 문학작품을 필사하며 남존여비 사상 속에서 여성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 등의 저항의식을 다룬 작품들을 내놓았고 뿐만 아니라 여성해방을 위한 사회활동에 가담하였다. 이에 대한 예시로는 안동에 여자야학교를 운영한 것을 들 수 있다. 여성의 역할과 한계가 뚜렷했던 시대에 나혜석은 글쓰기를 통해 수많은 여성들을 간접적으로 해방해주었고 가부장적 체제에서 벗어나 그녀 스스로가 주체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여성에 대한 인식이 무지했던 시절에 그녀를 향한 많은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지켜내고자 하는바를 지키며 꿋꿋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한 모습에 있어 나는 그녀에게 존경을 표하고싶다.
조선아 내가 너를 영결할 때
개천가에 고꾸라졌던지 들에 피 뽑았던지
죽은 시체에게라도 더 학대해다오
그래도 부족하거든
이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보아라
그러면 서로 미워하는 우리는 영영 작별 된다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100여 년 전 , 우리나라 문학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등단하였다. 이는 그 당시 많은 문학인들에게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켜왔는데, 그 당시 여성이 문학을 집필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나라의 정서상 센세이션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 가히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당시 소설계의 거장 이었던 이광수에 의해 발견됐다는 사실 이었다. 그녀는 작품 속에 주로 교훈적이고 계몽적인주제를 담았고, 이광수는 이러한 그녀의 작품들에 대해 “ 첫째, 시 문체에 의한 언문일치, 둘째, 문학에 대한 비 유희적인 엄숙한태도, 셋째, 권선징악을 초월한 현실묘사, 넷째, 비현실적인 관념 사고를 배제한 현실의 재현, 다섯째, 근대사상의 반영 ” 등을 높이 평가했다고 말했다.
김명순은 1896년 평양에서 출생하였다. 1903년에는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하였고 1905년도에는 기독교 계열의 평양 야소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1911년, 그녀는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김명순의 작품들은 주로 자연의 아름다움, 연정, 추억 등을 다루며 대부분의 작품이 ‘신여성’ 이라는 단어가 관통되어지고 있다. 여주인공의 내면심리를 묘사하며 그 당시 남존여비의 사상 속 억압되어있던 많은 여성독자층을 간접적으로 해방해줌으로서 그녀는 작품을 통해 여성독자들을 계몽해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작품 속에서 신여성의 의식구조를 보여줌으로서 가부장제에 대한 도전을 드러냈고 이 당시 이러한 문학적 대항은 가히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행보였다. 이는 문화주의에 입각해 설립된 많은 사립학교들이 여학생들에게 보다 더 주체적이고 자기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가고자하는 여성들을 육성해내고자 하는 이념과도 정확히 걸 맞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제가 시대에 맞지 않게 너무 성급했을까? 남성작가들은 잇따라 작품으로만 그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닌 그녀의 사생활과 작품을 연결 지어 그녀를 비판하였고 그녀의 작품은 “김명순은 외설적이다.” 라는 틀 안에 가두어져 제대로 평가받기조차 거부되어졌다. 그리고 이는 여성이 자유로운 자신의 생각에 대한 표출이나 표현 등을 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탄압받았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수많은 비판에 더불어 그녀의 평판은 결국 그녀가 쓴 문학작품에 대한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킬 정도까지 다다랐고 그녀는 소설 21편, 시 107편, 희곡 3편, 수필과 평론 18편, 번역시, 번역소설을 남기고 그녀의 문학인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김명순이 재조명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십 년이 채 되지도 않았다. 과거 그 당시 여성의 작품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그녀의 뛰어난 시를 널리 알리지 못했다는 점에 있어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추애경 (1900 – 1972)은 대구출신으로,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성악가이다. 그녀의 성악에 대한 재능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이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뛰어났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재능이 뛰어났다고 하여 성악을 한 시도 게을리 여기지 않았고 또한 성악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한시도 빠짐없이 몰두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천재 소프라노 라고 칭송받는 것은 어쩌면 예견 된 일이었다. 추애경은 1915년 신명여학교에 입학한다. 이 과정 속에서 그녀는 학생으로서 많은 배움을 얻고, 학업에 정진한 결과 그녀는 1919년 졸업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내고 이화학당 대학 예과에 들어가 성악을 보다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 속에서, 그녀는 단지 음악에만 몰두한 것이 아닌 주체적인 애국자로서의 면모 또한 보여주었다
그녀는 1919년 졸업 후 대구 3.1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하는 서문시장의 만세운동에 직접 참가하여 주도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외치었고 남들 못지않게 애국심을 함양하며 조국에 잃어버린 주권에 대한 회복을 외치었다. 이후 이화학당 예과, 본과 과정을 모두 다 마무리하며 성악에 대한 심화성, 전문성 또한 확충하게 된다. 이후 ,그녀는 1926년 신명여학교에서 교사로서 근무하게 된다. 그녀는 이제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데에 그녀가 여태껏 쌓아온 축적된 음악 지식들과 음악에 대한 애정을 쏟았으며 음악을 배움을 통해 널리 알리는 데에 집중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외 음악활동을 주최하면서 음악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통해 음악이라는 존재를 보다 친숙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게끔 활약하였다.
여러 활동을 주체 하면서 까지 음악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모습은 이전 만세운동에 참여한 그녀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시대적 배경으로서의 여성에 억압된 것이 아닌 주체적으로 참여해나가고 자기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 정진해 나가는 모습으로, 문화주의적 여성 사립학교가 지향하고자 했던 방향인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여성이 참여할 수 있게끔 만들 자라는 모토와 비슷한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 볼 수 있다. 그녀는 이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가로서의 포부 또 한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세계적인 성악가 가되어 음악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녀가 워싱턴대학교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녀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송별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자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지막노래를 듣고자 하였다.
이처럼 음악을 통한 그녀의 영향력은 상당했던 것이다. 세계에 진출한 이후에도 , 끊임없이 자기계발에 열중하여 1927년 워싱턴 대학교 음악대학 성악전공 중, 33국의 실력 있는 음악인들이 모여 실시한 성악 콩쿨에 참여하기도 하는등 그녀의 저력을 낯선 타지의 땅, 미국에서 마저 보여주었다. 보스턴의 음악잡지 ‘ 음악평론 ’ 은 추애경은 리락소프라노로서 조선의 찬사를 받아야한다. 라고 언급하기도 하며 세계적으로 그녀를 알렸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음악가로서의 포부 또한 달성하였다.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이는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이후 널리 퍼지게 된 인식으로 민족에 기반을 둔 국가의 형성을 지향목표로 하고, 이것을 창건, 유지, 확대 하려고 하는 민족의 정신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라는 말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분야에서 널리 통용되는 단어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민족의 자각에서부터 각성하여 출발하였다. 민족주의적 자각의 결과로 한국의 수많은 지식인들은 국가가 발전을 하기위해선 서양문화의 수용이 필연적으로 필요하며 교육이야말로 근대화추진의 원동력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민간인 사학의 설립이 활발히 진행되었고,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한 열망으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학교 설립은 초보적 단계의 학교에서 중등교육 단계의 학교까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정현석과 원산주민들이 세운 원산학사, 민영환이 세운 황화학교, 안창호가 세운 점진학교, 이용익이 설립한 보성학교 등을 민족주의에 의한 사립학교의 대표적인 예시로 들 수 있다. 이러한 학교들의 건학 정신은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가의 양성이 주를 이루었다.
도산 안창호 ( 1978 ~ 1938) 은 다양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라고 그를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민족독립을 위한 독립운동가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도 활약하였고 또한 교육자로서도 활약 하였다. 그는 교육이야 말로 개인의 발전, 사회의 발전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진정한 민족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였고 , 그의 교육사상을 총 3가지로 정리하였다. 이는 바로 자아혁신, 무실역행, 점진공부 이다. 이는 이 세 가지 키워드를 교육에 대한 중심영역이라고 내세우며 학업적인 공부뿐만 아니라 모든 공부에서 점진적으로 나아가고 실천하며 바꿔나갈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강조는 한 개인, 한 민족, 한 사회에 그친 게 아닌 본인에게 까지 실천해 왔다. 그의 교육사상에 대해서는 홍사단의 ( 홍사단은 1909년 그가 설립한 청년학우회를 전통으로 삼는다.) 약법 제 2조를 통해 정확히 파악해낼 수 있다.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층의 남녀를 단합하여 덕, 체, 지 삼육을 동맹 수려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대업의 기초를 수립함” 이 바로 그것이다.
“독립운동 기간에 우리는 교육을 힘씀이 마땅할까요? 나는 단언하오, 독립운동 기간일수록 더 교육에 힘써야 한다고, 죽고 살고 노예 되고 독립됨이 판정되는 것은 지력과 금력이오. 우리는 아무리 하여도 이 약속을 벗어나지 못하오. 우리 청년이 하루 동안 학업을 폐하면 그만큼 국가에 해가 되는 것이요. 본국에는 아직 우리의 힘으로 교육을 실시하지 못하지만은, 기회가 있는 대로 공부를 해야 되고 시켜야 되고 독립을 위하여 공부를 게을리 아니 하는 이야말로 독립의 정신을 잃지 아니하오. 구가를 위하여 독립을 위하여 시간 있는 대로 힘써 공부하시오.” 이렇듯 안창호는 민족주의적 방향, 즉 독립운동 적 방향으로 교육을 생각하였고 그 생각을 전 세계 곳곳에 있는 동포에게 알리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보고서의 기본적인 내용은 ‘ 한국 근현대이행기 민족운동 ’ 이라는 책을 기반으로 작성하였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16438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누구인가
https://www.yna.co.kr/view/AKR20161001051900005
56년 만에 되살린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 일대기
http://www.doctors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4872
여의사1호- 박에스더
https://www.wome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2952
[김점동(박에스더), 여자의사 120년] ④ 국민과 하느님에 헌신한 의사의 삶
https://news.joins.com/article/5124912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33818&cid=47317&categoryId=47317
지식백과 유관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09385&cid=40942&categoryId=31778
지식백과 3.1 운동
https://www.yna.co.kr/view/AKR20180117072800371
[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근대 여성작가 김명순
https://ncms.nculture.org/local-artist/story/4610
영남 최초의 여성성악가, 추애경
https://blog.naver.com/dgwff/220720080239
추애경2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798264&cid=42129&categoryId=42129 안창호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