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
인천공항중학교 1-7
1911년 3월 3일,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까지 서울에서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농민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29년 경서 제 2공립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전개하였으며, 그 해 12월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가 퇴학처분을 받았다.
1930년에는 서울청년회의 후신인 중앙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농민조합 및 적색농조 조직 및 운영을 담당하였다. 후에도 여러 단체에 가입하여 책임자로 활동하며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나, 1934년에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옥고를 치렀다. 훗날 2007년, 그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국내 1920년도 후반
1869년 11월 15일, 전라남도 장성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천도교도였으며, 전남 장성군 북하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 소실을 듣고 미리 태극기를 준비하는 등 시위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고, 1919년 북하면 약수리 백양산 백련암에서 학생들(대표적으로 박창수, 이창석 등)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다음날 장성읍내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였고, 시위 후 임상규는 체포되어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훗날 2006년, 그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국내 1919년
3.1 만세운동의 한복판에서 그 의미와 소중한 가치를 온몸으로 체득한 보은의 대표들은 고향으로 돌아와 뒤늦게나마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였고, 조용한 시골마을이었으나 선각자들은 뜻을 맞출 수 있는 사람들을 열심히 설득하였다.
1919년 4월 초, 사람들은 낮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밤에는 산에 올라 만세를 외쳤으며 안민순 역시 보은군 수한면 묘서리에서 최용문, 송덕빈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 주민들을 규합하여 농암산에 60여명을 모아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놀란 일제치하 보은경찰서의 악질 형사들은 마을마다 돌면서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을 색출하였는데, 이때 안민순은 서지리, 윤정훈, 석성국 등 10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과 재판을 거쳐 옥고를 치렀다.
-국내 1919년
신팔균은 1882년 5월 19일,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정동계(현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한성부판윤을 지냈고, 그의 조부인 신헌은 병조판서를 지내으며 강화도조약 때 조선 측 협상대표로 나오기도 하는 등, 그러한 업적을 세운 집안에서 자랐다.
그는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에 육군 참위(오늘날의 소위)로 임관했으나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 해산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해 8월 부친의 고향인 충청북도 진천군 이곡면 노원리로 내려가 이월청년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고, 항일 애국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는 각지에 있는 동지들과 연락하여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대동청년당 가입,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 교관 및 서로군정서에서 독립국 양성, 대한통의부의 직할부대인 ‘대한통의부 의용군’에서 사령관과 군사위원장이 되는 등 많은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의 독립군 무차별 공격에 신팔균은 총상을 입고 사망하였고, 죽는 순간까지도 일본과 끝까지 싸우지 못한 것을 분통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훗날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해외 1907년
1894년 2월 15일, 충청북도 진천에서 출생하였다. 그녀는 1912년 서울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할 때 일본경찰에 쫓겨 환자로 가장하여 입원하고 있던 신팔균(申八均)과 1914년 결혼하였다.
그 뒤 신팔균과 함께 만주에서 비밀문서의 전달, 군자금의 모금, 독립군후원 등에 힘썼다. 신팔균이 항일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의 군사위원장으로 항일전쟁을 수행할 때에도 계속 같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2월엔 신팔균이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있을 때 대규모의 일본군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는데, 참모들이 신팔균의 전사사실을 감추고 귀국을 재촉하므로 귀국하였다가 뒤에 전사소식을 알고 유복녀를 죽이고 음독 자결하였다. 그리고 훗날 1977년엔 건국포장이, 1990년에는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해외 1915년 즈음
1892년 8월 21일, 당진시 신평면 초대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당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1924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박윤성 등과 함께 비밀 결사체인 독서회를 조직 하고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 의식을 고취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 후 신간회에서 간사·대표 위원·상무 집행 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9년에는 신간회 중아 검사 위원으로 선출되어 중앙에서도 활동하였고, 그 해 말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하는 학생 시위를 촉발하기 위해 1930년 초, 당진에서 석문 공립 보통학교에 격문을 배포하는 등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이 일로 체포되어 11개월 동안 고초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듭 항일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1932년에 다시 체포되었고, 병보석으로 출옥한지 4개월 만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다 훗날 2005년, 그에게 건국 포장이 수여되었다.
-국내 1924년
1852년 8월 6일, 황해도 수안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그 후 독립운동에 뜻을 품고 대한독립단 국내지단에서 활동하였다.
최일호가 활동한 대한독립단은 그 시기 만주지역 대부분의 독립운동단체들과 마찬가지로 무장투쟁을 통하여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했다.
대한독립단에서는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 설치, 군자금 모집, 독립군 양성, 만주와 국내에서의 일본인 및 친일파 숙청 그리고 일제기관 파괴 등도 전개하였다. 최일호는 여기에서 상해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활동하다가 수안지역 대한 독립분단장이 되었다. 그는 훗날 1920년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적의 무도함을 질책하다 절식한지 9일만에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훗날 1995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국내>해외 1919년 3월 1일
1881년 3월 17일, 충청남도 청양군 사양면 대봉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06년 의병장 안병찬이 결성한 홍주의진에 참가하여 홍주읍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 박창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청양군에서 지내다 독립 후 1957년에 사망하였다. 그리고 훗날 2010년, 정부는 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2012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였다.
-국내 1906년
1900년 8월 4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16일부터 18일에 이르는 기간동안 충남 논산군 채운면 심암리에 있는 이근석 가택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여 태극기 300여 매를 제작하는 등 준비를 하고 동년 3월 20일 강경의 장날을 기하여 시장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는 등의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피체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후에 1926년, 그는 동아일보 대전지국을 경영하였으며 야학을 세워 교육사업에도 종사하는 등 민족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훗날 1990년, 정부에서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1989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국내 1919년 3월 16일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유관순의 집안 사람들은 모두 개신교였고, 그에 따라 유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녀는 1918년에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 4월에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의 회원으로 활발이 활동하였다.
이화학당의 몇몇 학생들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졌던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3월 5일에는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유관순도 다른 학생들과 교사와 마찬가지로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일제가 전국에 휴교령을 내리자 유관순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 때 유관순은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했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다 그녀는 체포당해 심한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고문과 영양실조로 인해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훗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19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국내 1919년 3~4월
1885년 9월 21일,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0년엔 의병대장으로 활동했던 처남 오의제와 은밀히 연락하여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해 주었고, 1919년 3월에는 연백군 유곡면 영성리 주민들과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체포되어 가택수색 때 숨겨뒀던 태극기와 총기 등을 압수당했다. 결국 그 해 5월, 평양 지방법원에서 소위 법인 은닉 및 제령 제 7호 위반 혐의라는 명목으로 지역 3년형을 받고 서흥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1921년에는 3.1운동기념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런 공훈을 기리어 훗날 1990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국내 1910년
1877년 4월 20일, 경상남도 창원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천도교인으로 1919년 3월 말에 변상태, 권영대, 권태용 등과 만세시위를 계획하였고 범우범에게도 만세시위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여 함께 태극기 수십장을 제작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1일, 그는 창원군 진전면 일암리에서 변상태 등과 시위군중 1,500여명을 지위, 진동 헌병주재소 앞으로 군중을 선도, 그러다 헌병대의 지원을 받은 일본 수비대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 때 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그는 군중을 해산시킨 후 일경에 피체 당했다.
다행이도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그 해 11월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고, 그 후에도 상해 임시정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계속 항일운동을 이어나갔다. 후에는 부산축항기념축하회에 참석하는 총독부 정무총감 등 일제고관을 처단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옥고를 치렀다. 훗날 1990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국내 1919년
1884년 2월 28일, 충청남도 천안군 풍세면 미죽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허병, 이문현, 인시봉 등과 함께 천안읍 장날인 3월 29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3월 29일 오후 2시가 되자 시장을 돌아다니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고, 군중에게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최오득은 30~40명의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을 하고 인시봉과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며 독립만세를 불렀으나 이 일로 체포되었다. 그는 1919년 6월에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완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훗날 정분ㄴ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며 2017년에는 그의 유해를 국립 서울현충원 108시실 171호에 안장했다.
-국내 1919년 3월
1914년 1월 5일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 복교리에서 그는 출생하였다. 그는 1933년, 정읍공립농업학교 3학년에 재학하던 중 동교생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사회 과학 서적을 탐구했으며 그해 7월 말에는 동교생 6명과 함께 정읍 앞 산정에서 회합을 갖고 현 식민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공장, 농촌에서 실천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뒤 정읍공립농업학교 내의 부안·옥구·정읍·임실 지역 각 학우회에도 독서회를 조직케 하고 적색노동조합의 조직 계획 적극 참여 등 실천운동에 앞장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1934년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밥 위반 명목으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을 때까지 약 4개월간 옥고를 치렀고, 훗날 200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국내 193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