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을 하면 한 나라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는 과제가 생길 것이다. 우리가 사는 도시인 인천 또한 인천항 개항이라는 역사를 안고 있다. 인천항 개항 이전에는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유지에 힘을 썼지만, 인천항 개항 이후 서구 여러 나라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고, 궁극적으로 새로운 세계의 질서에 편입이 된 것이다.
1883년, 까마득히 옛날 일이다. 그만큼 인천항 개항도 오래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도시 인천. 이곳에 조선의 근현대사에 중요한 하나의 발자취인 인천항 개항의 첫 시작, 그 배경에 대한 궁금증으로 본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인천은 1888년도에 세워졌다. 그때 당시에 인천은 제물포항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외국인들이 올 때 인천을 통해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 묶고 쉴 만한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1876년 2월 27일 조선 정부는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했다.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 조약1)을 통해서였다. 강화도조약 이전에도 조선은 중국과 일본은 물론 류큐왕국 등과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화도 조약을 통한 문호 개방은 인접 국가보다는 그 동안 외교관계가 없었던 서구제국에 대한 문호개방과 교류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조선의 운명을 이전과는 다르게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일본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이전의 일본과는 다른 차원에서 관계를 새롭게 정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이전까지 조선과의 외교관계가 을의 입장에 가까웠다면, 강화도 조약을 통해서 대등하거나 힘의 우위에 있음을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강화도조약 제4조는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고 규정하고 제5조에서는 대조선국 개국 485년 자년(1876년) 2월부터 모두 20개월 안에 경기, 충청, 전라,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에 편리한 항구 두 곳을 지정한다고 하였다. 즉 1878년 말까지 부산항외에 2곳을 추가로 개항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개항된 곳이 원산과 인천이었다. 원산 이 1879년, 인천이 1880년에 개항하였다.
부산은 이미 통상을 위한 용도로 개항되어 있던 상태였으니, 실질적으로 새로 개항된 곳은 원산과 인천인 셈이다. 이중에서 동해안에 개항된 원산은 러시아에 대한 견제와 대륙침략을 위한 거점 그리고 통상을 위한 개항장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인천은 원산과는 성격이 달랐다. 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개항은 도시의 재편을 가져왔다.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4개 직업군 중에서 상업(商)을 마지막에 둘 정도로 상업을 천시하였는데, 이는 고려시대에 상업의 발달이 가져온 사회적 폐해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사대부들의 다짐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외국과의 거래가 거의 없어 포구의 발달이 미비했다. 포구는 국내용으로만 필요했다. 유일한 국제 항구의 역할은 일본을 향해 열려 있던 삼포였다. 부산포, 내이포, 염포 중 부산포가 강화도 조약이후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빠른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정부는 개항장에 통상 사무업무를 관장하는 감리서를 개항장에 설치하였다. 감리서는 행정면에서는 관찰사와 동등한 지위를 가졌으며, 통상교섭관련 업무에 한해서는 목사나 부윤에게 훈령하고 지령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9월 24일에 감리서가 폐지되고, 해당 업무를 통감부 이사청에서 관장하였다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해 조선은 다양한 나라에 사람들을 파견시켰다.”
강화도 조약 이전에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했던 조선통신사가 조선의 선진문물을 일본에 전달해주는 역할을 했던데 반해, 수신사 파견은 조선이 일본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다.
“수신사는 강화도조약을 통해서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역전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수신사는 1876년, 1880년 그리고 1882년에 걸쳐 세 차례 파견되었으며, 수신사들은 일본의 서구화된 제도를 받아들여 조선의 제도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였다.
1876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기수는 일동기유(日東記遊)와 수신사일기(修信使日記)를 남겼고, 1880년 김홍집 역시 수신사 일기를 남겼으며, 1882년 3차 수신사였던 박영효는 사화기략(使和記略)을 남겼다. 수신사로 다녀온 이들은 우리보다 서양에 대해 문호를 먼저 개방했던 일본이 괄목할만한 변화를 가져왔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고, 이는 곧 중국과 달리 성공적으로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자국의 국력을 신장시키고 있는 일본이 조선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데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수신사외에 1881년 일본에는 조사시찰단도 파견되었다. 이른바 신사유람단으로 불렸던 12명의 고위관리가 이끄는 64명의 시찰단은 약 4개월 동안 일본에 체재하면서 도쿄·오사카 등에서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大藏)·군부 등 각 성(省)의 시설과 세관·조폐 등의 각 분야 및 제사(製絲)·잠업 등에 이르기까지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시찰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던 사람들은 1882년 1월에 통리기무아문 각사의 개편 때 각각 자신이 맡았던 조사 관련 부서에 배치되어 개화정책에 적극 참여하였다
청국에는 영선사가 파견되었다. 영선사는 1881년 청국의 근대식 병기의 제조와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 파견되었던 유학생을 인솔하는 사신이었다. 김윤식을 필두로 유학생 20명, 기술자 18명등 모두 83명이 파견되었으나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중도에 귀국하였다.
당시 유학생 파견에 대해서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앞선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겠다는 고종의 강한 의지에 의해 실행에 옮겨졌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정부가 중국으로 유학생 파견을 추진하자, 일본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제도 도입을 권유했다는 점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조선정부는 실리적인 중립적 입장을 취해 중국에는 영선사, 일본에는 조사시찰단을 파견하였다.
중국에 파견된 유학생들은 1882년 1월 8일부터 톈진기기국(天津機器局) 동국·남국에 배속되어, 화약·탄약 제조법, 기계조작법 등 근대적 군사지식뿐 아니라 자연과학·외국어 등도 학습했으나 임오군란으로 6개월여 만에 귀국함에 따라 무비자강(武備自强)의 목표는 완수되지 못했다. 1883년 5월에 착공하여 1884년 5월에 준공된 삼청동의 번사창(飜沙廠,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1호) 1)은 영선사의 성과였다.
인천항 개항의 역사는 고종이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한 것부터 시작된다. 1883년 7월15일, 조선은 최초로 서방 세계에 대동하여 미국으로 보빙사를 파견하였다. 이 보빙사는 당시 조선 최고의 엘리트 청년 8명으로 구성된 견미 외교 사절단이다.
보빙사 일행, 앞줄 가운데가 민영익이고, 왼편에 홍영식과 서양인이 퍼시벌 로웰 그리고 오른편에 서광범과 우리탕이 앉아있다.
구성원은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대신 홍영식(洪英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수원 유길준(兪吉濬), 고영철(高永喆), 변수(邊燧), 현흥택(玄興澤)·, 최경석(崔景錫) 등과 중국인 오례당(吳禮堂), 일본인 미야오카(宮岡恒次郎), 미국인 로웰(Lowell,P.) 등 모두 11인이었다.
보방사의 구성원 인물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