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배수빈
학교 상인천여자중학교
2021 탐구자
이 글은 유관순 열사가 어떻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는지, 유관순 열사가 한 독립운동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았다. 또한 감옥 내에서의 독립운동과 그 후를 알아보았습니다.
예전에 학교에서 유관순 열사님에 관한 영화인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 그 영화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에 그 영화를 다시 보니 유관순 열사님의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대임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맞서 싸워주셨던 모습을 보니 너무 감동스러웠고 나라도 그런 용기는 못 냈을 것을 알기에 유관순 열사님이 우리를 위해서 또 어떤 용기를 내셨을지 궁금하고 유관순 열사님의 행동들을 더 찾아서 보면 나뿐만 아니라 친구들까지도 많이 감동받고 애국심이 강해질 것 같다.
3·1운동의 역사적 인물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한국의 잔다르크’이며, ‘3·1운동의 꽃’이라 불리는 유관순 열사이다. 유관순은 1902년 11월 17일 충남 천안군 지평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 사이의 3남 2녀 가운데 둘째 딸로 태어났다. 부친 유중권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어 흥호학교를 설립했고 친척인 유빈기의 전도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유빈기는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내려와 1908년 지평리교회(현 매봉교회)를 개척하였고 유중권과 조인원(조병옥의 부친)이 교회를 섬기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훗날 아우내 만세운동의 한 축을 형성한 매봉교회 교인들에게 만세운동을 지도한다.
유관순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의협심이 강하며 매사에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다. 집안의 가풍은 전통적인 유교 분위기와 신학문의 기독교 분위기가 조화를 이루어 유관순이 신앙을 통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환경이 되었다. 사촌언니 유예도는 유관순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중 하나로서 선교사들 사이에 그 총명함이 알려져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된다. 몇 년 뒤 유관순도 선교사인 사애리시 부인의 추천으로 공주영명학교를 거쳐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게 된다. 앨리스 해먼드 샤프선교사는 1905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의 감리교회 선교를 위해 남편인 로버트 샤프 목사와 함께 한국에 온 사람이다. 공주시 영명학교 (현재 공주영명고등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남편 샤프선교사가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장티프스로 1906년 별세하자, 천안과 논산을 거점으로 교회, 영아육아원, 학교를 세워서 감리교회 선교활동과 교육사업을 하였다.
유관순은 이화학당에서 두 사람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는다. 정동교회 손정도 목사와 이화 학당 박인덕선생이다. 독립운동가와 상해 임시의정원의 의장으로 더 유명한 손정도목사를 통해서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았고, 하나님 사랑이 곧 나라 사랑임을 배우게 된다. 박인덕선생은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옥중에서도 양부모와 친지들을 잃고 큰 절망 가운데 있던 유관순을 격려하고 지도해 주었다. 박 선생은 3.1운동 때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고 또한 대한애국부인회 회장으로 독립군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낸 혐의로 옥고를 치렀다.
3월 1일 서울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종교인 33명 민족대표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을 외치는 대중시위운동이 담 밖에서 울려 왔다. 유관순은 친구 몇 명과 교장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 서울 시내의 시위운동에 합류했다. 이화학당 학생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 김복순· 김희자· 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서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나는 대한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 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처벌한 권리도 없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지만 ‘독립’이라는 빛은 보지 못했다. 18년이란 짧은 생을 마감하고 25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결실이 맺어졌다. 유관순의 항거는 민족의 자주독립 정신의 상징일 뿐 아니라, 일제하에서 자라난 세대들임에도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했던 신세대의 등장을 상징하는 일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유관순 열사님이 대단하시다는 것만 잘 알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어떻게 독립 운동을 하시게 되었는지를 잘 몰랐는데 이번에 많이 알게 되어서 뿌듯하고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