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계몽운동

애국계몽운동

나영서
영화국제관광고등학교 1-2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

애국계몽운동의 자세한 내용과 배경은 알지 못해서, 애국계몽운동이 왜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 운동을 통해 그 당시 사람들이 이루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알아보기 위해 이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1. 애국계몽운동이 무엇인가?

1905∼1910년 사이, 일본의 침략에 맞선 개화자강파(開化自强派)가 일으킨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

한국 민족은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의 일부를 빼앗겼다. 애국 계몽 운동을 추진했던 사람들은 대한 제국이 주권 국가로서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외교권을 빼앗긴 것은 자기 민족의 실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라의 권리를 되찾으려면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실력만이 살길이다. 민족의 힘을 기르자.’며 교육을 일으켜 국민의 지혜를 북돋우고, 산업을 발전시켜 나라의 부를 일으켜 세우자고 외치며 민중 계몽 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민족의 실력을 길러 나라의 권리를 되찾자는 운동을 ‘애국 계몽 운동’이라고 한다.


2. 애국계몽운동이 필요했던 당시의 상황

우리나라를 두고 세력 싸움을 하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일어난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고, 견제하던 러시아의 세력이 물러서자 일본은 더 적극적으로 우리나라를 통치하려 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일본과 을사조약(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자주적인 주권을 무시하고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 그 중 핵심은 외교권을 빼앗긴 것 이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비롯해 맺는 모든 조약들을 일본이 대신해서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왕이 있어도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없고 일본이 대신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이를 당연히 받아드릴 수 없었고 을사조약서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
하지만 을사5적이라는 친일파들의 사인을 통해 인정되지 않은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약을 받아드리지 않던 고종은 강제로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었다.
그 후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한반도 전체 약 40%의 토지를 빼앗았고,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여 한국을 일본의 식량기지로 삼으려고 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헌병경찰을 통해 많은 한국인들을 고문하고, 비인간적인 처벌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재를 일본으로 밀반출하고, 훼손하였다.


3. 애국계몽운동과 젊은 지식인들

- 보안회 (1904) 

러일전쟁이 일어난 뒤 전세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각종 이권을 탈취하려고 획책하였다. 특히 황무지 개척권을 이양받기 위해 일본공사를 통하여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왔다. 이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유학자 및 관리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고, 지속적인 반대운동을 벌이기 위해 송수만, 심상진 등이 서울 종로 백목전에서 민중회의를 열고 ‘보안회’를 창설하였다. 이러한 보안회의 활동 덕에 결국 정부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거절할 것임을 발표하였다.

- 헌정연구회 (1905)

민족의 정치의식 고취와 입헌정치 체제 수립을 목적으로 이준, 양한묵, 윤효정 등이 1905년 창설한 애국운동단체이다. 대표적인 친일단체인 일진회에 맞서 근대적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헌정 관련 연구 활동과 국민교육 강화, 국력 배양운동을 전개하였다.

- 대한자강회 (1906)

대한자강회는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임진수, 김상범 등 20여 명이 헌정연구회를 확대, 개편한 것이다. 국민 교육을 고양하고 식산을 증진해 부국강병을 이루어 장차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1906년 4월에 조직되어 강연회의 개최, 기관지 발행 등을 추진하였다.

- 대한협회 (1907)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 간부들과 천도교의 대표로서 권동진, 오세창 등을 추가시켜 10명으로 조직하였다. 이 협회는 국가의 부강, 교육과 산업의 발달을 추구하였다. 정치, 교육, 산업을 강구하여 국민의 자질을 향상시키고자 한 것이다. 또한 관인, 폐습의 교정, 근면 저축의 실행, 권리·의무·책임·복종 등 국민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 신민회 (1907)

1907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보안법·신문지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계몽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안창호의 발기에 의하여 양기탁, 이승훈, 이회영 등 사회계몽운동가들이 국권회복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신민회의 목표는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체를 공화정체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의 양성을 주장했다.


- 그 외의 활동들

이승훈은 안창호가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여 평안북도 총감이 되었고, 서적의 출판과 공급을 목적으로 태극서관이라고 하는 서점을 경영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민족교육운동에도 앞장섰고, 1907년 평북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오산학교는 평민정신, 민족사랑,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새로운 학문과 애국사상을 일깨웠다.

대성학교는 독립운동가 안창호가 신민회 활동의 일환으로서 교육의 근거지를 마련하고자 1908년 설립한 사립 중등학교이다. 평양시 중구역에 세워진 대성학교는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이들의 실력과 인격을 함양할 것을 목표로 했다.
이로써 그는 능력 있는 인재와 더불어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 운동가를 양성하는 것을 궁극적인 교육 방침으로 설정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

애국 계몽 운동이 전개되면서 국민들은 일본의 간섭을 막기 위하여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자는 운동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어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 각 지방으로 퍼져 나갔다. 국민들은 담배와 술을 끊고 반지와 비녀 등을 내어 성금을 모았으며, 여러 단체와 언론 기관이 모금 운동을 벌였다.

민족 신문간행

근대 사회와 문화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 중의 하나는 신문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는 관보의 성격을 띠었으며,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되었다. 최초로 민간에서 간행한 신문은 독립신문이었다. 서재필이 한글과 영문으로 간행한 독립신문은 국민을 계몽하고 자주 정신을 일깨우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들에게 나라의 소식을 전해 주는 일도 하였다. 그 후 창간된 황성신문은 한글과 한문을 섞어 간행되었으며, 애국적인 논설과 국민들의 애국 활동에 관한 소식을 많이 실어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황성신문은 을사조약의 내용이 발표되자,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는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제국신문은 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간행되었는데, 한글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국민 계몽과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한 논설과 기사를 실었다.



3. 결론

애국 계몽 운동은 지식인들이 사회⋅문화적 활동을 통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실력 양성 운동으로 여러 분야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정치⋅사회단체로는 보안회와 신민회, 민족 신문으로는 황성신문과 대한 매일 신보, 민족 교육 기관으로는 사립학교들이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국채 보상 운동은 경제적 민족 운동의 성격을 지녔으며, 성금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으려 하였다.

일제로부터 우리나라의 국권을 지키고 다시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여러 운동을 하신 그 시대의 운동가분들이 너무 존경스럽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이 역사탐구를 통해서 계몽운동이 무엇이고 어떤 단체가 있었는지 처음 알게 되었는데, 지금 현재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소중하고 여러 운동가분들이 지키신 우리나라의 역사를 잘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고 맞서 싸웠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운동가분들을 우리가 잊지 않고 더 기억할 수 있도록 역사동아리나 캠페인 만들기 등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