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 투쟁운동

의열 투쟁운동 대해서

나예진
인천보건고등학교 2학년
2021년 탐구자


목차

1. 글 쓰게 된 동기 

2. 의열 투쟁운동 

3. 을사보호 조약
   1) 5적 암살단 조직
   2) 을사조약 이후 의병들의 활동/ 정미의병 1907
   3) 울분에 자살한 사람들/ 민영환
   
4. 의열단 조직
    1919년 지린(길림)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이다.

5. 해외 의열 활동
   1) 스티븐스 사살 (1908)
   2)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09)

6. 소감


1. 글 쓰게 된 동기 

제가 의열 투쟁운동을 선택한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조금 알고 있어서 더 조사해 알아가면 좋을 것 같아 선택하였습니다. 저 처럼 의열투쟁 운동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살피기 위해 인터넷에서 자료들을 다운 받아 편집 하였다.


2. 의열투쟁 운동

정의: 일제강점기 안동 지역에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개인이나 소수 인력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의열투쟁

 의열투쟁의 의미맥락
‘의열투쟁’은 의사와 열사라는 역사적 인물형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사적 기개로써 의로운 일의 실행에 용맹과감하게 나섰음을 강조하면 의사라는 호칭이 붙고, 대의를 좇아서 죽음의 길로 감연히 뛰어들었음을 강조하면 열사라는 호칭이 붙는다. 전자의 행위가 대체로 무기를 가지고서 대적거사를 벌이는 것으로 구체화된다면, 후자의 행위는 맨손의 항거나 자결로써 충절과 의분을 드러내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나를 버리고 선를 취하며 자기희생을 마다않거나 자진해서 택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의열’이란 생사불망의 정신이 낳은 행동의 의로움과 그 행위에 뒤따르는 희생의 장렬함을 함께 기리는 뜻을 담은 용어인 것이다. 출처: 우리역사 넷

 의열투쟁 본격화의 배경과 계기
3·1운동은 민족성원 대다수의 식민통치 거부의사를 강력히 표명하고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만방에 선양했다는 점에서 분명 그 의의가 컸다. 그러나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민족독립의 목표는 끝내 달성되지 못하였다. 이에 다수의 독립운동자와 일반 대중은 비폭력 시위항쟁이 갖는 한계를 절감했고, 폭력수단을 총동원한 지속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일제를 구축하여 독립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만주·노령 쪽의 망명 독립운동자들이 그런 신념을 확고히 다져서,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독립 성취의 유일한 방도로 상정하였다. 이에 따라 무장독립운동 단체와 독립군 부대들 조직구성에 박차를 가했으며, 군사활동이 불가능한 지역을 염두에 둔 강력한 폭력투쟁의 방법도 따로 강구되었다. 출처: 우리역사 넷


3. 을사보호 조약

1) 5적 암살단 조직

• 시대 : 1905
• 인물 : 나철(나인영), 오기호, 박대하, 서창보, 이홍래
• 신분 : 의병, 구국운동가
• 정의 :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늑약 체결에 협조한 을사 5적 습격

시대적 배경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 17일에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내정을 간섭하려고 체결한 조약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내정을 감독하려고 한양에 통감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궁궐을 포위하고 고종과 대신들에게 이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경우 선전포고도 불사하겠다는 등의 위협을 했다. 결국 이완용을 비롯한 5명의 대신이 이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을 관장하게 되었다. 특히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온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을사조약 체결 뒤 대한제국은 주권을 크게 제약받아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다.

세부 사항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 각지에서는 이 조약의 철회를 요구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일본의 악랄함과 5대신의 매국 행위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시종무관 민영환 등은 항의의 뜻으로 자결했으며, 한양의 상인들은 상점을 폐쇄했다. 또한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 전국에서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 토벌에 나섬으로써 의병 항쟁은 더욱 거세졌다. 조병세, 이상설, 안병찬 등은 을사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벌과 조약의 폐기를 황제에게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벌였고, 나철, 오기호 등은 5적암살단을 조직하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1907년 3월 5일 나인영, 오기호 등
을사오적암살단은 권중현의 집이 있는 사동입구에서 그가 문을 나서기를 기다렸다. 이때 이홍래(전직 총순)가 앞장을 섰다. 양복을 차려입은 권중현이 인력거를 타고 나오고 일본 병정 및 순사 6∼7명이 모두 총칼을 들고 그를 둘러싼 채 지나가고 있었다. 이홍래가 용기있게 앞을 가로막고 권중현의 어깨를 잡고서 "역적은 네 죄를 알렸다"라고 꾸짖으며 협대에 간직한 육혈포를 찾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육혈포가 제때에 나오지 않았다. 권중현의 종자들이 일제히 이홍래를 붙잡았다. 이때 또한 의사 강원상이 육혈포를 꺼내 권중현을 향해 쏘았으나 권중현이 급히 피하여 길가의 민가로 들어가 문을 닫고 몸을 숨겼다. 강원상이 또 한 발을 쏘았으나 문이 닫혀 있어 맞지 않았다. 이에 병사와 순검들이 호각을 불어 사동 부근을 파수하던 순검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강원상은 몸을 날려 교동 민영휘의 집 뒷간에 숨었으나 그 집 노복들이 알려주어 순검의 추적에 잡히고 말았다. 이지용을 죽이러 갔을 때 이지용은 용산 강정에 있었다. 이지용 암살을 맡은 사람이 가서 엿보니 사동에서의 권중현 암살 미수사건이 이미 전화로 보고 되어서 병정 60여 명이 급히 달려와 호위하고 있었으므로 역시 죽이지 못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의열투쟁, 

을사오적 암살단

나철 :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종교 초대교주.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출생 : 1863년 12월 2일 전라남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마을 
      (현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
사망 : 1916년 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비밀 결사인 유신회를 조직하고 구국 운동을 꾀했다. 1906년 나철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 통감부의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 관계에 있던 일본 대신들과 접촉해 을사조약을 폐기하고 통감부를 철폐하는 일에 관해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상자를 구입해 을사오적을 처단하려 했지만 폭탄을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 이후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했는데 음력 정월 초하루에 을사오적이 신년 하례를 드리기 위해 입궐할 때 처단하려 했지만 결사대원들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아 실패했다. 그 후 대원을 5개조로 나눠서 2월 5일, 8일, 12일 3회에 걸쳐 암살을 시도했지만 대신들이 경호를 철저히 받고 있어서 실패했다.

얼마 후 동지 서창보가 체포되어 고문을 못 이기고 발설하면서 오적 암살 계획은 발각되었다. 그는 동지들이 차례로 체포되자 동지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 등과 함께 자발적으로 평리원에 출두했고 1907년 7월 3일 유배형 10년을 선고받고 지도로 보내졌다. 하지만 1907년 12월 고종 황제의 특사로 유배 4개월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나철은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 통로를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회복하는 방안을 모색했지만 성과가 나타나지 않은채 귀국해야 했다.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 유근, 정훈모, 김인식, 김춘식 등 동지들과 함께 한성부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 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는데 이 날이 중광절이다.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고 단군의 개국과 입도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이라고 하였다. 출처: (나무위키) 

오기호 : 한국의 독립운동가. 나철과 함께 대종교를 창시한 인물.
출생 : 1865년 11월 18일 전라도 강진현 (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
사망 :  1916년 12월 24일 (경성부 권농동)

1865년 11월 18일 전라도 강진현(현 전라남도 강진군 군동면 덕천리)에서 아버지 오영환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달련의 딸 사이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가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 강행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오기호는 나철과 연명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메이지일왕에게 각각 장문의 글을 보내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어 외무대신 박제순에게 급전을 보내 조약이 강제 체결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실패하여 을사조약은 강제 체결되었고 통감부가 설치되었다. 오기호는 분노를 금치 못하고 귀국한 뒤 을사오적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오적 암살단'을 결성한 그는 1906년 3월 25일 나철 등 여러 인사들과 함께 여러 곳에서 일제히 거사하여 을사오적을 동시에 처단하려 했다.

그러나 이홍래, 강원상 등이 사동에서 군부대신 권중현을 습격하는데 그치고 많은 참가자들이 곤혹을 겪게 되었다. 이에 오기호는 나인영, 김인식 등과 함께 자현장을 가지고 평리원에 나가 자수하여 모든 일은 자신들의 책임이고 다른 사람들은 죄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그는 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지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사면을 받고 한성부로 돌아왔다.

1909년 나철과 함께 대종교를 창시한 후 대종교 포교에 의한 종교 보국 운동에 진력했으며 1916년 12월 24일 서울 권농동 우거에서 사망했다. 그 전에 나철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2010년 그의 유해를 국립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출처: (나무위키)


2) 을사조약 이후 의병들의 활동/정미의병(1907)

의병 활동의 모습

①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② 활동 지역 :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후에 독립군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③ 의병장 : 처음에는 덕망이 높은 선비들이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지만, 점차로 용감하고 전술에 뛰어난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크게 활약하였다.
 - 대표적 의병장으로는 신돌석, 최익현, 민종식 등이 있다.
④ 무기 : 총이나 신식 무기가 없었고, 대나무로 만든 창이나 농기구를 들고 싸웠다.
⑤ 신돌석 : 평민 출신 의병장으로 1906년 농민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고, 경상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큰 전과를 올렸다.

의병 활동의 변화

① 독립군에로의 가담 : 의병들은 일본의 탄압을 피해 간도와 연해주, 북만주로 이동하여 독  립군이 되었다.
② 전투력을 정비하는 데 힘을 쏟으며 소규모 전투로 국경을 넘나들며 일본군과 싸웠다.
③ 독립 전쟁을 일으킴 : 이들은 후에 1920년대의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대첩과 같은 대규   모의 무장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출처 : (지식인)

정미의병(1907)

정의 :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확대된 의병전쟁.

1905년(광무 10) 통감부 설치 이후 조선병합을 서두르던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뒤,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력인 군대를 해산시켰다. 

해산군인들은 해산당일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의 자결을 계기로 서울 ·원주 ·강화 진위대 등지에서 무장봉기를 하는 한편, 무기를 가지고 각지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해산군인의 의병참여는 당시 일제의 탄압으로 침체상태에 있던 후기 의병활동을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전환기를 맞게 하였다. 

우선 후기의병은 해산군인의 참여로 무기와 병력이 크게 강화되었고 또 전술의 발전도 가져왔다. 특히 일본군이 조선의 지형에 어두운 점을 이용하여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벌인 게릴라전술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무력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이 해산군인의 의병참여로 크게 고양된 후기 의병은 일제가 1909년 9월 1일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이기까지 전민족의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후 의병구성에서도 종래의 유생 중심에서 벗어나 농민 ·하급 해산군인 ·천민 ·노동자 등도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미의병 [丁未義兵] (두산백과)


3) 울분에 자살한 사람들/ 민영환

민경환 : 대한제국 성립 후 육군 부장(현재의 중장에 상당)의 지위에 올랐으나 본래는 과거에 급제해 관료가 된 문신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 자결함으로써 순국한 애국지사이다. 조선 말기의 관료. 고종의 어머니 여흥부대부인의 남동생 민겸호의 아들이자 민겸호의 형 민태호의 양자이다. 따라서 고종은 그에게 고종사촌이 된다.

출생 : 1861년 8월 7일 한성부 중부 수진방 수진궁계 박동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사망 : 1905년 11월 30일 한성부 중부 견평방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공평동) (나무위키)

생애 및 활동사항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검열·설서·수찬·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이해 6월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구식군대의 불만과 대원군의 재집권욕 등이 복합적으로 이뤄져 1882년 폭발한 임오군란의 발발로 아버지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 참의에 임명된 뒤 도승지·전환국 총판홍문관 부제학·이조 참판·내무 협판·개성 유수·해방 총관·친군연해 방어사·한성 우윤·기기국 총판 등을 역임하였다.
1887년 상리국 총판·친군전영사·호조 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893년 형조 판서·한성 부윤, 1894년 독판 내무부사·형조 판서가 되었으며, 1895년 8월 주미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일제는 한국에서의 세력 우위를 점하고자 1894년 도발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요동반도를 점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독일·프랑스와 연합하여 삼국간섭으로 뜻이 좌절되면서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일제가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민영환은 주미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고향에 내려갔으며, 때때로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언을 올렸다.

1896년 4월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특명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윤치호·김득련·김도일등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이때 인천을 떠나 상해·나가사키·동경·캐나다·뉴욕·런던·네덜란드
·독일·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여장을 풀었고,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이해 10월 하순 귀국하였다.

그 뒤 의정부찬정군부대신을 역임하였다. 1897년 1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귀국하던 중 손병균·김병옥 등을 대동하고 러시아에 들러 러시아 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각국 외교 사절을 예방하였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해외 여행으로 각국 특히 구미제국의 발전된 문물 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하였다. 귀국 후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극력 후원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정교는 지금 정부 요인 중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한규설과 민영환 밖에 없으므로 민영환을 군부 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면 민심이 수습될 것이라고 고종에게 상주까지 하였다.
1898년 의정부 참정 내부 대신 겸 군부 대신을 지냈으나, 어용 단체인 황국협회의 지탄과 공격을 받아 한때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 뒤 다시 참정 대신·탁지부 대신에 임명되었고, 민영환의 건의에 의하여 설치된 원수부의 회계국 총장·장례원경·표훈원총재
·헌병사령관을 등을 역임하였고, 훈일등태극장·대훈위이화장을 받았다.

러일전쟁 후 다시 내부대신·군법교정총재·학부대신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날로 심해지는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당하였다. 1905년 잠시 참정 대신·외무 대신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난 뒤 외교권 강탈을 우려하여 무장이었던 한규설을 총리 대신으로 추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를 소두로 백관들과 연소를 올려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이 해산당하자, 자신이 소두가 되어 다시 백관들을 거느리고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에 일제의 협박에 의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육의전)에 모여 소청을 설치하고 항쟁할 것을 의론하였으나 국운이 이미 기울어졌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하게 할 것을 결심, 본가에서 자결하였다. 세통의 유서가 나왔는데, 한통은 국민에게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에게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 학부 주사 이상철, 평양대일등병 김봉학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영환 [閔泳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 의열단 조직

1919년 지린(길림)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이다.

구분 : 무력독립운동 단체
설립일 : 1919년
설립목적 : 항일독립
주요활동/업무 : 일본고관 암살, 관공서 폭파
소재지 : 중국 만주 지린성

1920년대에 일본 고관(高官) 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는 급진적 민족주의 성향을 띠었다. 1919년 3·1운동 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해외로 옮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더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필요에 따라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지린성에서 독립지사들은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이 이름은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한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들이 미온적이고 온건하다고 본 의열단은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폭파라는 과격한 방법을 통해 독립운동을 해나기로 했다.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고문으로는 김대지·황상규가 맡았고, 단원으로는 김원봉·윤세주·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
·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에 선히 하고 단원의 의에 급히 함. 
⑤ 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하지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에 필응함. 
⑧ 피사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함이다.

이와 같이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으며, 암살대상으로는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부수뇌·타이완총독·매국노·친일파거두·적탐(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 등을 지적하였다. 한편, 파괴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각 경찰서·기타 왜적의 중요기관을 선정하고 이 시설에 대한 폭파를 의도했다. 이를 위해 의열단은 폭탄제조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초기 의열단의 의거활동
① 밀양·진영폭탄반입사건 
②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③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④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 
⑤ 상하이 황포탄 의거 
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삼판통·효제동 의거 
⑦ 제2차 암살파괴계획 
⑧ 도쿄니주바시폭탄투척 사건 
⑨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 등을 들 수 있다.

의열단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신채호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외교론 ·준비론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다. 신채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의열단은 독립운동에서 퍼져나가고 있던 사회주의 이론을 1926년부터 점차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변화는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 중앙집행위원회가 발표한 ‘창단 9주년기념 성명’에서 잘 나타난다.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1929년 12월 베이징에서는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급진좌파로 변신해갔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하이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김규식·김창숙·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중화민국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열단 (두산백과)


5. 해외 의열 활동

1) 스티븐스 사살 (1908)

정의: 1908년 일본의 앞잡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사살한 사건.

전명운·장인환 :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옹호한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 사살(1908)

사건과정 : 스티븐스는 일본 외무성 직원으로 있다가 1904년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된 후 일본정부의 파견으로 구한국정부 외부고문으로 취임한 자로서,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아 을사조약에 관한 일본의 변명을 선전하기 위해 정략휴가차 1908년 3월 21일 본국에 돌아왔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기자회견을 통해 「을사조약은 한국민을 위해 취해진 당연한 조치이며, 한국민은 독립할 자격이 없는 무지한 민족」이라는 망언을 하여 최유섭 등 한교대표 4명으로부터 무수히 구타당했으며, 3월 22일에는 재미교포 정재관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그의 집을 방문, 친일망언을 규탄했다. 이튿날 스티븐스는 일본영사와 함께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오클랜드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가 전명운의 저격을 받았다.

그러나 탄환이 불발되어 전명운은 총신으로 스티븐스를 때리면서 격투를 벌이던 중 뜻밖에 같은 한국청년 장인환의 총탄이 날아와 스티븐스를 절명시키고 전명운에게는 어깨에 총상을 입혔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현장에서 미국경찰에 체포되어 전명운은 7년 11개월, 장인환은 25년 징역을 각각 인도받았으나, 그들의 열렬한 애국심이 동정을 받아 전명운은 곧 석방되고, 장인환은 10년 만에 특사로 출옥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스티븐스 저격사건

전명운 :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재미교포. 아호는 죽암이며 한성부(서울특별시) 태생이다. 1903년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떠난 후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교포로 지내다가 1908년 장인환 의사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친일파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출생 : 1884년 6월 25일 (조선 한성부)

사망 : 1947년 11월 19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1884년 한성부에서 태어났으며 한성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 하와이로 이민을 가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에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여 알래스카 어장과 철도공사 노무자 등으로 일하였다. 한때 도산 안창호가 조직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던 적이 있다.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생활하던 중 미국의 외교관이자 대한제국 외교관 출신이었던 더럼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 지배야말로 당연한 결과이자 한국의 백성들이 일본 덕분에 잘 살게 될 것이라는 발언망언을 하게 되자 이에 격분하여 그의 암살을 계획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휴양차 기차에 승차하려던 스티븐스를 향해 저격을 시도했으나 권총이 불발되는 바람에 서로 육탄전이 벌어졌다. 전명운 의사는 권총을 뒤집어 잡고 그립으로 스티븐스의 얼굴을 구타 했으나, 더럼 스티븐스도 반격에 나선다. 체격의 차이로 전명운 의사가 한참 열세였다. 그런데 같은 목적으로 그 자리에 온 장인환이 등장했고, 장인환 의사는 전명운 열사의 고성으로 인해 상대가 더럼 스티븐스임을 눈치채고는 그의 등 뒤에 권총 3발을 발사한다. 이 중 한발은 전명운 의사의 팔에 총상을 내고 나머지 두 발이 스티븐스의 가슴을 맞췄다.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실려갔지만 얼마 못 가 죽었다. 장인환과 전명운은 서로 만난 적도 없는 사이로, 당연히 이 암살을 사전에 상의한 적도 없다. 두 사람이 동시에 스티븐스를 저격한 것은 우연의 일치였다.

이후 장인환과 함께 체포되어 팔을 치료 받은 후 미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만, 전명운은 이 살인사건에 직접적인 범인이 아니고, 장인환 의사와 사전에 모의한 혐의가 없다는 점으로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 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도움을 줬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가 1909년에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고 1930년 로스엔젤레스에서 거주하게 되고 미국 정부에 귀화신청을 하게 된 끝에 '맥 필즈' 라는 미국 이름으로 개명한 후 세탁소를 운영하게 되었다. 조국의 광복을 보기는 했지만 생활고로 인해서 귀국하지는 못했고 결국 1947년 세상을 떴다 출처: (나무위키)

장인환 : 한국의 독립운동가. 평안도 평양부에서 태어났으며 1905년에 미국으로 이   민을 떠났다가 1908년 샌프란시스코 기차역에서 전명운과 함께 미국 외교관이자 친일파인 더럼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둘은 별도로 스티븐스 저격을 계획했고 우연히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나타나 같이 스티븐스 저격에 성공했다.

출생 : 1876년 3월 10일 (조선 평안도 평양부)
사망 : 1930년 5월 22일 (향년 56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전명운과 함께 미국 법정에 선 장인환은 2급 살인 혐의로 재판에서 징역 25년형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교포 사회에서 많은 성금으로 변호사를 고용해 주고, 변호인의 노력과 그의 애국심을 알게 된 현지 판사들의 배려에 따라 10년으로 감형되어 복역하고 석방된다.

1927년 조만식등 조선 민족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51세의 윤치복과 혼인하고, 평안북도 선천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등 사회사업에 투신 하였으나 일본제국 경찰의 감시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가 1930년 병고를 앓게 되면서 투신자살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유해가 봉환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나무위키)


2)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09)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사살(1909)했다. 4차례나 일제의 총리를 지낸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맺는 데에도 크게 역할했다. 그가 만주를 방문하여 러시아와 회담을 갖는다는 소식을 대동공보사에서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것에 자원했다. 만주의 독립 운동가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유승렬, 김성화, 탁공규는 7인 동맹을 맺고 처단을 계획했다. 

10월 21일에 대동공보사 기자 이강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그리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 관성자역과 도착지인 하얼빈역, 채가구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취소되었다.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얼빈 역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 

사건과정 :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일본 제국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이었던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의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이토가 오전 9시 15분 하얼빈 역에 도착해 차내에서 약 25분 정도 코콥초프와 대화한 후, 그의 권유에 따라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 그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중근이 총알을 발사하여 이토를 명중시켰다. 그 중 두발은 복부에 맞았다. 안중근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다시 3발로 주위의 수행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하얼빈 주제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를 쏘았으며, 안중근을 죽이려들며 해를 끼치자 일본군 장교 1명을 사살했다. 블라디미르 코콥초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눈앞에서 일어난 사고에 당황하지 않고 쓰러진 이토를 부축했으며 이토는 그의 품에 쓰러졌다. 수행원인 무로다, 나카무라 등도 다급하게 이토를 껴안아 보호했다. 이때 안중근은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그 다음 러시아어로 '꼬레아 우라[코레아 후라](대한 독립 만세)!' 를 두어 차례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잡혔다. 이토는 "당했다"라고 한마디 하였다고 한다. 수행원들은 우선 이토를 차내로 옮기고 이토가 좋아하는 브랜디를 한잔 따라 건네주었다. 이토는 이때 지팡이를 꼭 잡고 있어서 무로다가 이것을 빼내고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잠시 신음하다가 피격 30분 뒤인 오전10시경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덤덤탄에 맞아 숨졌고, 일행 중 일부는 총상을 입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등 관련자 3명은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 체포된 후 러시아 검찰로부터 간단한 조사를 받다가, 저녁에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10월 28일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관동주 뤼순감옥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가 관동도독부 법원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게 되면서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했다. 

하얼빈 역 1번 플랫폼에는 거사현장에 두 개의 도형이 그려져 있다. 바닥에 안중근의 저격 지점과 이토의 피격 지점을 표시했다. 저격 지점엔 가로·세로 각각 50cm 크기의 정사각형 안에 세모를 그려 놓았다. 세모의 한 꼭짓점이 이토가 섰던 자리를 가리켰다. 이토의 피격 지점엔 정사각형 속에 또 다른 네모를 각도를 90도 정도 틀어 그려 놓았다. 출처: (위키백과)

안중근 :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 운동가이며 의병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평화주의적 아시아주의자이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유관순, 김구, 안창호, 윤봉길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제일 유명한 독립운동가 중 1명.

출생 :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 (황해남도 해주시)
사망 : 1910년 3월 26일 (향년 30세)(110주기) 일본 제국 관동주 펑텐성 뤼순커우구 뤼순감옥

  본래는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산업 등 민족의 계몽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활동했으며 FN M1900으로 일본 초대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를 단행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은 그의 전 생애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얼빈 의거 참조.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군인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 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 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쟈거우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채가구)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 FN M1900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혹시 몰라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3발 모두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 각각 1발씩을 맞췄다.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토를 저격한 후 혹, 자신이 이토가 아닌 무고한 늙은이를 살해한것인가 생각이 들어 이토 주변의 남자들을 저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된다. [출처] 지식백과, 위키백과, 나무위키



6. 소감

   의열투쟁운동에 대하여 조사하면서 처음에는 의열투쟁과 5적 암살단 조직과 스티븐스 사살과 이토 히로부미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는데, 조사하면서 누가 누구를 사살하려고 했는지 어떻게 사살 게획을 세웠는지 등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사는 간략하게 나와서 자세히는 배워보지 못했는데 제가 직접 찾아가면서 해보니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도 배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우리나라를 빛내주신 분들은 자신이 위험해 질 수도 있는데 어떻게든 성공시키기 위해서 힘써주신 분들에게 감사하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안중근의사처럼 절대 못했을 것 같습니다.